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마누엘 칸트 (문단 편집) === 가난한 대학 생활과 기나긴 강사 생활 === 칸트는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알베르투스 대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에 합격했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신교 국가에 필요한 교사와 설교자 혹은 목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1544년에 세워진 동프로이센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칸트는 이곳에 새로 등록하면서 어떠한 장학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 독립을 원했고, 국가로부터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기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려고 했다. 그보다 나은 처지의 친구들이 그에게 커피와 빵, 옷 등을 대주었다. 또한 칸트의 외숙 리히터는 제화업을 하는 궁한 형편임에도 조카를 많이 도와주었다. 칸트는 절친인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와 오랫동안 조촐한 방에서 함께 살았다. 칸트는 그와 함께 가끔씩 당구를 치기도 했는데, 당구 실력이 수준급이라서 내기 당구를 해서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임마누엘 칸트는 1740년 9월 24일에 알베르티나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신교 국가에 필요한 교사와 설교자 혹은 목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1544년에 세워진 동프로이센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칸트는 이곳에 새로 등록하면서 어떠한 장학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 독립을 원했고, 국가로부터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기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려고 했다. 그보다 나은 처지의 친구들이 그에게 커피와 빵, 옷 등을 대주었다. 또한 칸트의 외숙 리히터는 제화업을 하는 궁한 형편임에도 조카를 많이 도와주었다. 칸트는 가장 좋은 친구인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와 함께 오랫동안 조촐한 방에서 살았다. 칸트는 그와 함께 가끔씩 당구를 치기도 했는데, 이는 좋은 휴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데 쓸모가 있기도 했다. 이 나이 어린 학생은 유별나게 숙달된 놀이꾼이어서, 이기지 않고 집에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전해진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2)] 칸트는 대학교에서 신학, 자연과학, 고등수학을 청강했다. 1년 뒤 칸트는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을 만나게 되었다. 크누첸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학문 일반의 유럽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성찰, 수학적인 증명과 박물학적인 탐구는 칸트라는 젊은 학생에게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크누첸의 강의와 토론 연습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열한 살 위인 교수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1731년에 슐츠를 알게 되었듯, 자유롭게 떠돌던 이 학생은 10년 뒤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을 만나게 되었다. 크누첸은 슐츠의 주선으로 알베르티나에 논리학 및 형이상학 원외 교수로 초빙된 인물이다. (중략)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 선생들 가운데 크누첸은 "학문 일반의 유럽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성찰, 수학적인 증명과 박물학적인 탐구는 칸트라는 젊은 학생에게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크누첸의 강의와 토론 연습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열한 살 위인 교수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6~68)] 크누첸은 칸트에게 1687년에 출간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빌려주었는데, 이 책은 칸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은 "아마도 일직이 등장한, 개별적으로 저술된 물리학 저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칸트 자신이 떠올렸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크누첸은 우선 칸트에게 1687년에 출간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빌려주었다. (중략) 이 책은 "아마도 일직이 등장한, 개별적으로 저술된 물리학 저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칸트 자신이 떠올렸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수학적 곗나의 필요성과 인과적 설명에 따른 기대의 결합은 학문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1~72)] 또한 크누첸의 서재에서 칸트는 '사무엘 클라크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오간 서신'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자연 철학과 종교의 원리'를 주제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와 뉴턴을 등에 엎은 사무엘 클라크의 논쟁이 쓰여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나중에 칸트가 해결점을 찾았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와 뉴턴/클라크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힘'의 정당한 측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1715~16년에 사무엘 클라크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오간 서신의 심화된 논쟁을 통해 칸트는 교훈을 얻었다. 이는 아마도 유럽의 정신사에서 주목할 만한 재기 넘치는 서신 왕래였던 것 같다. (중략) 이에 "자연 철학과 종교의 원리"에 대한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실험적 자연철학이라는 뉴턴의 실재론이 자리 잡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나중에 칸트가 해결점을 찾았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3~74)] 이 연구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점점 더 허약해져가는 그 시기에 칸트는 자신의 첫번째 책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을 써 내려갔다. 1746년, 평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철학부에 내놓았을 때 아버지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직후였다.[* 1744년, 이 젊은 철학자는 라이프니츠와 뉴턴/클라크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힘'의 정당한 측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점점 더 허약해져가는 시기에 칸트는 자신의 첫번째 책(『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을 썼다. 1746년, 평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철학부에 내놓았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5)]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칸트는 남은 유산을 정리했는데,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넘겨받았다. 학생이던 칸트는 더 이상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강의 요목을 좇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강의 자체를 거의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난한 칸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가정교사가 되는 길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규정된 규칙 없이 그 스스로 자유롭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자신의 특별한 길을 걸어가는 천재에게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 필요한 법이다. 174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칸트는 남은 유산을 정리했는데, 많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누이를 돌보아야 했다. 아직 정규 학업 과정을 끝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가난한 칸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가정교사가 되는 길 외에 달리 무엇이 있었겠는가?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8)] 학업을 중단한 뒤, 1748년 칸트는 먼저 인스터부르크와 굼비넨 사이에 있는 유드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다니엘 안더슈 목사 댁의 일을 보았다. 3년 뒤에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남쪽에 있는 그로스-아른스도르프에서 휠젠 집안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1754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1748년, 칸트는 먼저 인스터부르크와 굼비넨 사이에 있는 유드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다니엘 안더슈 목사 댁의 일을 보았다. 그 뒤에 쾨니히스베르크의 남쪽에 있는 그로스-아른스도르프에서 휠젠 집안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1754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8)]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6년 동안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전원적인 고독 속에서 안정된 몇 년을 그는 집중적으로 자연 연구에 사용했다. 칸트는 물리학ㆍ지리학ㆍ천문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학문적 기록들을 남겨놓았다. 칸트의 자연철학적 연구들은 바로 이 근면함으로 인해 이루어졌는데, 시간이 날 때면 그는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자연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6년 동안 그는 교육적 임무에만 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전원적인 고독 속에서 안정된 몇 년을 그는 집중적으로 자연 연구에 사용했다. 칸트는 물리학ㆍ지리학ㆍ천문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학문적 기록들을 남겨놓았다. 칸트의 자연철학적 연구들은 바로 이 근면함으로 인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30대에 이 연구물들을 들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출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람과 불 그리고 지구의 연령과 지축 회전에 관한 연구, 물체의 역학에 관한 연구, 1755년 지구의 대부분을 흔들었떤 지진의 특수성에 관한 연구 등이 그것이라 하겠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06~107)] 인쇄한 지 3년 뒤의 일이지만, 1749년 여름에 드디어 그의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칸트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견본 한 부를 문화계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보냈다. 자신의 첫 저술에 대한 서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동봉한 편지에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을 통해,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도에 최후의 결정을 일깨우려는" 독일 자연철학이라는 암시가 곁들여져 있다. 같은 날에 칸트는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도 이 책을 보냈다.[* 1749년 여름에 드디어 그의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쇄한 지 3년 뒤의 일로, 칸트는 물론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8월 23일에 견본 한 부를 문화계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보냈다. 자신의 첫 저술에 대한 서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동봉한 편지에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을 통해,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도에 최후의 결정을 일깨우려는" 독일 자연철학이라는 암시가 곁들여져 있다. 같은 날에 칸트는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도 이 책을 보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일러를 베를린의 학사원에 초빙했다. 오일러는 그곳에서 1744년부터 수학 수업을 이끌었다. 동봉한 편지의 내용에는 젊은 철학자의 자부심이 불확실한 자기 평가와 결합되어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2)] 동봉한 편지의 내용에는 불확실한 자기 평가가 결합된 젊은 철학자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힘(vis viva)에 관한 그의 형이상학적 꿈이 적혀져 있는 칸트의 이 첫번째 글은 출판상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칸트의 첫번째 글은 출판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살아 있는 힘(vis viva)에 관한 그의 형이상학적 꿈은 고유한 정신적 힘에서 비롯된 넘쳐나는 자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3)] 1754년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학문적인 언론인으로서 일했다. 1년 뒤, 『자연사와 천체 이론』[* 『자연사와 천체 이론』의 첫 문장에서 칸트는 벌써 자신을 몰아댄 우주론적 시도의 엄청난 난관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칸트는 태양계에서 항성 전체로 시야를 확대시켰다. 이제 1750년 더행의 라이트가 세운 새로운 가설이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지구가 자신의 축을 회전하면서 불러일으키는 하늘의 순환을 제외하고 항성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반대해, 칸트는 이 별들이 "아마도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보다 높은 질서의 행성들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칸트는 호이겐스와 헬리 및 모페르튀가 확신했던 "일종의 안개 같은 별들" 역시 다시금 보다 높은 질서의 현상이라고 추측했다. 특히 그 타원형의 모습은 칸트로 하여금 이 안개 같은 조직이 "파악할 수 없이 수많은, 더구나 하나의 공통된 중심을 둘러싼 별들의 모임과 다를 바 없다"고 가정하게 했다. 즉, 갈락시스도 태양계나 은하계와 마찬가지로 같은 체계에 따라 정돈 되어 있다는 것이다.]을 썼으며, 1755년 4월 17일에 자신의 석사논문인 「불에 관하여」를 제출하고 5월 13일에 시험을 치렀다. 9월 27일에는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명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내놓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강사 자격을 얻고, 동양학 교수인 게오르크 다비드 키프케 교수 저택에서 첫 강의를 했다. 1756년 4월 8일, 서른두번째 생일을 두 주 남겨놓고 칸트는 "가장 위대하고 막강한 왕"인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공석으로 있는 자리에 교수직 신청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느 누구보다도 자연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을 일깨우고 지도했던 스승 마르틴 크누츠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1751년 노환으로 죽자 공석으로 남은 것이었다. 이제 그의 제자는 그 자리로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정교수 자리는 아니었고, 보수도 신통치 않으면서 강의를 많이 해야 하는 특별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이 직위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쾨니히스베르크의 사강사라는 가시밭길에서 벗어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대학 당국은 경비 절약을 이유로 교수직을 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칸트는 교수가 되기 전까지, 강사의 신분으로 강단이라는 모루 뒤에 앉아 매일같이 "같은 강의의 무거운 망치를 균일한 박자로" 내려치며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756년 4월 8일, 서른두번째 생일을 두 주 남겨놓고 칸트는 "가장 위대하고 막강한 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공석으로 있는 교수직 신청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느 누구보다도 자연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을 일깨우고 지도했던 스승 마르틴 크누츠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1751년 1월 25일 노환으로 죽자 공석으로 남은 것이다. 이제 그의 제자는 그 자리로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정교수 자리는 아니었고, 보수도 신통치 않으면서 강의를 많이 해야 하는 특별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이 직위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칸트로서는 수년 전부터 애쓰고 있던 목표가 드디어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략) 칸트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로 그의 특이한 대학 과정을 끝마쳤다. 1748년에서 1751년까지 그는 프로이센의 외딴 지역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이어 알베르티나의 사강사라는 가시밭길로 접어들면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2~93)] [* 칸트가 1756년 4월 6일에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특수 교수직을 지원했을 때, 그의 느낌은 매우 좋았다. 그의 업적은 필요한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희망을 만족시키기에는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의 지원이 성과 없이 끝난 것에 그는 실망했을까? 아무튼 대학 당국은 멀리 떨어진 베를린에서, 경비 절약을 이유로 교수직을 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8)] [* 가난한 석사 칸트는 그의 위대한 노력이 충족될 때까지 강단이라는 모루 뒤에 앉아, 매일같이 "같은 강의의 무거운 망치를 균일한 박자로" 내려치며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